얼마 전 대한민국 미술계의 큰 별이자 대표적인 여류 화가 천경자 화백의 별세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등단한 몇 없는 여류 화백이자 여류 작가이셨습니다. 여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화려한 색채의 꽃과 여인에 인생의 슬픔과 고독의 한을 담아낸, 천경자 화백의 일생과 작품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출처: 위키백과사전 천경자(https://ko.wikipedia.org/wiki/천경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하던 이 무렵 본명이던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인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이다. 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됐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을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하고 1945년 첫 딸 이혜선을 낳는다. 1946년부터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 전남 모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난다. 1950년 전쟁 통에 여동생 천옥희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경자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지고 만다.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슴 설레고 형용할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1]
천경자 화백은 자녀 2남 2녀를 낳았다. 첫 남편 이철식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김남중과 사이에 1남 1녀를 둔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이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었던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모 서점 대표 김종우는 천경자의 막내이다. 아이들에게는 남미짱(이혜선), 후닷닷(장남 이남훈), 미도파(둘째딸 김정희), 쫑쫑이(막내 김종우)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천경자 화백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그 자신이다.
여동생마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픔을 견디지 못한 천 화백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화폭을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다.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 동경 이도 화랑(畫廊)에서 개인전을 열고,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된다.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종군하면서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천경자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타히티 여행 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1973년작 ‘길례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을 그렸다.[2]
1955년에는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3]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도 호흡했다. 2006년에 새로 편집돼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놨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나온 것이다.
천경자 화백의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8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천 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11월 채색화와 스케치 등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4]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을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가 2003년 7월 2일에는 뇌출혈로 쓰러진다.[5]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 천경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소장품과 아트상품 등이 갖추어져 있는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다.[6]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여자로서는 팔자가 센 것으로 비친 천 화백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이렇게 풀이한다.
| 내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 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림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
배우 윤여정은 ‘가락 있는 멋쟁이 화가 천경자 선생님’이란 제목의 글에서 “1976년 뉴욕 맨해튼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게 어울리는 멋쟁이를 처음 봤고 그가 곧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고 적었다.
방송인 황인용은 방송을 통해 화백을 여러 번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남도 억양이 있는 민요 자락과도 같은 목소리, 이국적인 액세서리 등으로 천 화백을 기억했다.
시인 고은은 “천경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것밖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천형(天形)의 예술가다.”라고 말했다.[7]
시를 많이 쓰지는 않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을 통해 천 화백의 성품과 기질을 소개했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명동시절이나/ 이십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가까와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그의 언어를 시적이라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 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세간에선 천 화백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받은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그의 슬픈 전설의 페이지에도 사랑에 대한 아픔, 삶의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천경자는 큰 키에 파격적인 색깔과 무늬의 옷,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했던 하이힐, 머리를 둘러싸는 커다란 화관이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게 칠한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했던 스타였다. 반달형의 눈과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당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ㆍ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유영국, 김현승, 고은 등의 남성 예술인과 박경리, 한말숙,전숙희 등 여성 문인들과 단짝이었다. 또 세대를 뛰어넘어서는 이덕화, 조용필, 고바우 김성환, 강부자, 김수미 등 연예인들과 함께한 시간들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주석
-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
- 김미리 (2015년 10월 22일). “꽃과 영혼의 화가 ‘영혼의 꽃밭’ 속으로”. 조선일보.
- “네이버 인물정보 천경자”. 2014년 9월 10일에 확인함.
-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tv조선》 2014-09-04
- 김정선 (2015년 10월 22일). “천경자 恨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의 페이지”. 연합뉴스.
- 〈천경자전시관〉. 《두산백과》 (한국어). 2014-19-21에 확인함.
- 김정선 (2015년 10월 22일). “천경자의 지인들…문화예술계와 깊은 인연”. 연합뉴스.



